
한국디지털트윈연구소 양영진 대표
“저거는 지혜를 제공할 수 있는 기술이다.”
양영진 한국디지털트윈연구소 대표는 2015년 KAIST 연구실에서 모델링·시뮬레이션 기술을 접했을 때를 이렇게 돌아봤다. 오랫동안 시스템통합(SI) 사업을 해온 그에게 정보를 모아 보여주는 일은 익숙했다. 하지만 정보를 받은 뒤 무엇을 할지 판단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었다. 그가 본 기술은 여러 선택을 가상으로 시험하고, 그 결과를 비교해 문제를 풀도록 돕는 것이었다.
디잡뉴스와 만난 양 대표는 디지털트윈의 쓰임을 ‘가상 실험’에서 찾았다. 현실의 설비와 운영 방식을 컴퓨터 안에 모델로 만들고, 조건을 바꿔가며 결과를 살피는 것이다. 발전량을 예측하거나 설비의 운영 조건을 찾는 일부터 복잡한 시스템의 의사결정을 돕는 일까지, 한국디지털트윈연구소는 이 기술을 사업으로 옮기고 있다.
기술을 고객에게 설명하는 일
출발점은 KAIST 김탁곤 교수와의 만남이었다. 양 대표는 군 복무 시절에도 시뮬레이션을 접했지만, 연구실에서 본 기술은 자신이 알던 것과 달랐다고 했다. 두 번째 방문에서 이 기술을 널리 알리고 싶다며 도움을 청했다. 사업은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말도 보탰다.
이후 양 대표가 운영하던 회사와 연구실의 교류, 공동 연구과제를 거쳐 2018년 한국디지털트윈연구소를 설립했다. 양 대표에 따르면 연구소기업 승인은 이듬해 1월 받았다. 김 교수의 오랜 시스템 모델링·시뮬레이션 연구성과를 사업화하려는 시도였다.
사업에 자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양 대표는 현대정보기술에서 인천공항 1단계 건설 사업에 엔지니어로 참여했고, 이후 영업으로 옮겨 대규모 사업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새로운 기술을 고객에게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기술 좋으면 다 팔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고객을 만나고 돌아오면 설명이 개념적이고 추상적이라는 반응이 따라왔다. 기술을 이해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지만, 왜 이 기술을 써야 하는지 전달하는 일은 또 다른 과제였다. 양 대표는 사업을 시작할 때 들었던 ‘기술로 사업하지 마라’는 김 교수의 말을 이제는 이해한다고 했다.
같은 발전기인데, 발전량은 왜 다를까
한국디지털트윈연구소가 상용화한 플랫폼은 ‘와이저(WAiSER)’다. 빅데이터와 AI, 시뮬레이션을 결합한 BAS 기술을 바탕으로 한다. 실제로 수집한 데이터와 설비가 작동하는 원리를 함께 활용해 디지털트윈 모델을 만드는 방식이다.
양 대표는 경주 풍력발전 사례를 들었다. 같은 회사가 만든 발전기라도 현장에서 운전한 결과는 서로 달랐다. 발전 원리가 같다는 이유로 하나의 모델을 그대로 적용하면 각각의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연구소는 발전기의 작동 원리로 모델을 만든 뒤, 1호기부터 9호기까지 실제 운영 데이터를 받아 각 발전기의 특성을 나타내는 값을 학습시켰다. 공통 원리에서 출발하되 현실의 차이를 반영해 발전기별 모델을 만든 것이다.
양 대표는 데이터로 학습하는 방법과 원리를 바탕으로 모델링하는 방법에 각각 장단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데이터만으로는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나 조건이 계속 달라지는 문제를 다루기 어렵고, 원리만으로는 현장의 모든 차이를 담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각각의 장점을 가지고 단점을 보완해서 모델링하는 방식, 그게 BAS 모델링 기술이고 핵심 기술이에요.”
모델을 만든 뒤에도 확인은 필요하다. 시뮬레이션 결과를 현장에서 수집한 데이터와 비교하고, 차이가 나면 모델을 보정한다. 가상 실험의 결과를 실제 판단에 쓰려면 모델이 현실을 얼마나 잘 반영하는지부터 살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교통을 풀었더니 환경 문제가 생긴다면
하나의 설비를 넘어 도시나 복잡한 조직을 다루면 문제는 더 커진다. 교통, 환경, 에너지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한 분야에서 좋은 선택이 다른 분야에서도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교통 문제 해결하니까 갑자기 환경 문제 생겨. 또 에너지 문제도 생겨.”
양 대표가 ‘와이저 페더레이션’을 설명하며 든 예다. 서로 다른 업체가 다른 도구로 만든 모델들을 연결해, 각 모델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전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피도록 돕는 솔루션이다.
교통 모델과 환경 모델을 따로 만들더라도 두 모델을 연동하면 교통 운영을 바꿨을 때 환경에 어떤 영향이 생기는지 함께 검토할 수 있다는 취지다. 모든 분야를 하나의 거대한 모델로 다시 만드는 부담을 줄이면서 전체의 운영 방안을 찾으려는 접근이다.
여기서 양 대표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모델을 만드는 목적이다. 같은 대상을 다루더라도 의사결정자와 현장 실무자가 알아야 할 정보는 다르다. 무엇을 판단할지에 따라 필요한 변수와 모델의 상세한 정도도 달라져야 한다. 현실을 무조건 정밀하게 복제하기보다, 풀려는 문제에 필요한 요소를 골라 모델로 표현해야 한다는 얘기다.
성능만큼 중요한 ‘목적을 달성했는가’
양 대표는 장비의 성능과 그 장비를 써서 얻는 효과도 구분했다. 무기체계라면 개별 장비의 성능뿐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운용하고, 누가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에 따라 임무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기준은 효과척도인 MOE다. 어떤 일을 했는지를 넘어, 그 일이 당초 목적을 이루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지 측정하는 지표다. ‘MOE 와이저’는 이런 효과를 측정하고 검증·분석하며, 더 나은 조건을 찾도록 돕는 솔루션이라고 소개했다.
“내가 목적한 대로 내가 한 일이 그 효과에 얼마나 기여했느냐? 측정해야 관리할 수 있잖아요.”
양 대표는 국방을 예로 들어 임무 성공과 피해 최소화를 함께 살펴야 한다고 설명했다. 원하는 효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장비의 조건을 바꾸거나 의사결정 방식, 운용 전술을 달리해 다시 실험하는 식이다. 운영 환경까지 고려해 여러 조합을 비교하고, 목적에 맞는 선택을 찾는 것이다.
AI가 내놓은 결과를 판단에 쓸 때도 같은 원칙이 필요하다고 봤다. 양 대표와 직원들 역시 업무와 개발에 AI를 활용한다. 다만 결과가 나온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채 중요한 결정을 맡기는 데는 우려를 나타냈다. 특히 잘못된 판단의 피해가 큰 분야일수록 모델과 결과를 검증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연구 성과를 현장으로 옮기는 문턱
가상 실험으로 문제를 다뤘다고 해서 현장 적용까지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양 대표가 소개한 식물공장 연구에서도 이 간격이 드러났다.
여러 단으로 쌓은 재배 선반 사이에서는 위치마다 공기의 흐름이 다르다. 팬과 공조기를 설치해도 어느 곳에 바람이 충분히 가는지, 어느 곳에 정체되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식물이 자라기 좋은 환경을 만들려면 이 흐름을 살펴 제어할 필요가 있다.
한국디지털트윈연구소는 디지털트윈으로 식물공장 안의 기류를 다루는 연구를 수행했다. 다만 양 대표는 실제 적용 단계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고 선을 그었다. 현장에 적용하려면 추가 투자가 필요한데 비용 문제로 연구에 그쳤다는 설명이다.
“적용은 실제로 못 했고 연구까지만 했는데, 적용하는 데는 투자를 해야 되잖아요.”
기술의 가능성과 고객이 비용을 들여 도입하는 일은 달랐다. 좋은 기술을 만드는 것과 그 기술이 현장에서 쓰이게 하는 것 사이의 어려움은 사업 초기뿐 아니라 개별 적용 사례에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기계에 판단을 맡기기 전에
연구소가 개발 중인 다음 솔루션은 피지컬 AI를 위한 ‘PAI 와이저’다. 양 대표는 기계가 정해진 동작을 수행하는 것과, 상황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도록 의사결정권을 주는 것을 구분했다.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사람이 모든 상황과 대응 방식을 미리 정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이때도 출발점은 모델이다. 양 대표는 데이터를 학습해 모델을 만들 수도 있고, 사람이 가진 지식과 노하우를 모델로 옮길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소는 두 방식을 결합하는 BAS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개발 과정에서는 판단의 정확성뿐 아니라 주어진 시간 안에 처리하는 성능도 중요하게 보고 있다. 아무리 적절한 판단이라도 대응해야 할 시점을 놓치면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기계가 행동하기 직전에 의도에 맞는지 확인하는 ‘런타임 보증(RTA)’ 기능도 개발 방향으로 제시했다. 사람이 맡긴 판단을 기계가 실행하는 만큼, 최종 행동 전에 검증하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양 대표는 인터뷰 내내 무엇을 만들 것인지에 앞서 왜 필요한지를 물었다. 목적을 정하고, 현실을 반영한 모델을 만들고, 선택에 따른 결과를 실험하는 과정. 그가 2015년 연구실에서 발견했다는 ‘지혜를 제공하는 기술’은 이 과정을 사람의 판단에 보태려는 것이다.
기술 도입을 고민하는 기업과 기관이 먼저 따져볼 것도 어떤 문제를 풀고, 무엇으로 그 효과를 확인할 것인가다. 현실에서 실행하기 전에 선택의 결과를 가상으로 시험해볼 수 있다는 것, 양 대표가 디지털트윈으로 전하려는 가치는 여기에 있다.
